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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산까지 따를 수 있는 저력 ”


“나는 86년 간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습니다”이 말은 AD156년 폴리갑이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하면서 한 말이다. 이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은 이 땅에서 고난과 죽음조차도 감사와 기쁨의 특권으로 의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천국으로 이어지는 총체적 축복이라 하겠다. 폴 틸리히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과연 욥에게도 그리 하셨다. 욥이 마음으로 뼈를 깍는 고통을 겪으며, 생명을 싫어할 만큼의 시험 중에 고백한 말은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험 다음에 올 엄청나게 큰 상을 이미 대기시켜 놓으셨고, 우리 후세 신앙인들이 보도록 하나님의 의사를 공개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과 완전히 닮은 자의 삶을 살다가 핍박 받은 분들이 바로 폴리갑이며, 허드슨 테일러 등이다. 반면에 현대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너무나 잘 호흡하며 살고 있다. 조화를 넘어서 가치관을 공유하고 칭찬과 환호를 받으면서 사는 것 같다. 과연 그런 환영과 인정이 우리가 참 신앙인 임을 증명하는 것일까 점검해야 한다. 빛은 항상 어두움을 노출시키기 때문에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빛이 공격적 자세로 어두움에게 무례하고 화나게 하고 시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닮게 되면 핍박은 불가피하게 오는데,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인 동시에 천국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거이기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대목이다. 예수님의 삶은 심각한 핍박으로 3년의 공생애 전체를 점철하였는데 그의 제자들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았고 그 마지막도 대부분이 순교로 매듭 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수 많은 선교사들은 엄청난 고난과 죽음을 당연시하며 사역에 임했다. 반면에 성도가 세상과 짝을 이루는 순간 핍박은 사라지고 영화가 찾아온다. 물론 그 시작은 조금의 타협이겠지만, 조직력을 갖춘 <대세> 가 되는 순간부터 바리새인적 성품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런 다음 군림하게 되고 교회 건물과 조직력을 자랑하다가 마침내 눈에 가시 같은 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본보기가 먼저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며, 또 로마 교황청이 아니겠는가. 어떤 고난도 잘 피해 다니면서 <핍박 사각 지대> 에서 안주하는 자가 과연 참 기독교인일까 나는 의구심을 가진다. 로마인들은 수많은 신을 숭배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을 무신론자로 여겼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정부의 진노를 샀다. 핍박을 받을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셈이다. 위선자들은 감람 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는 다는 말이 있다. 현대의 우리도 직장에서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라고 계속 말하여 보라. 따돌림이라는 핍박이 올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해 보라. 앞 뒤가 탁 막힌 세련되지 못한 성도라는 핀잔이 올 것이다. 적어도 이런 핍박이라도 받아 이겨 내어야 갈보리 산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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