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 넘치는 심판
나는 손주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녀들을 키울 땐 상당히 엄한 아빠였었는데 어느 사이에 나의 손주에 대한 정체성은 꾸지람을 잘 못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번도 들지 않았던 회초리를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다가 손주들의 아빠 엄마에게 들어 친다. 하기 싫고 마음 아픈 꾸짖음이어서 눈을 찔금 감고 치는 긍휼의 매이다. 옛 속담에 “매는 먼저 맞는 것이 좋다” 고 하였다. 실상 이리 저리 피하다가 맨 맞을 때는 낙제나 단절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기 쉬우며, 아픔 보단 허망함을 가져다 주는 선포가 된다. 히브리서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히12:6-8) 하였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겐 이 땅에서 징계와 채찍이라는 <긍휼의 심판>을 미리 내리신다. 그 표현을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채찍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그의 아들임이 확인 된다는 뜻이다. 혹시 하나님이 지정하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계속 넘나들어도 아무런 징계가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발람이나 사울 왕을 버리실 때와 같은 수순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다윗에 대한 채찍은 거의 말년까지 그리고 그 후손에게 이르도록 이어졌다. 흠이 별로 없었던 모세도, 21세기에 사는 성도들 거의 전부가 그 정도 쯤은 쉽게 저지르는 <므리바 물 사건> 으로 오매불망 원하였고 출애굽과 40년의 광야 생활에 총 지휘를 했던 자에게 약속의 땅에 한 발도 들여 놓지 못하게 한 징계의 수준은 신약 성경만 가지고는 이해하기 조차 어렵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미7:9) 이런 하나님의 조치가 바로 광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긍휼이 넘치는 심판> 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발람이나 사울에게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약2:13) 하였으니,보라 만년의 사울은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자 무당을 찾아간 그 참담함을.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이 세상에 거할 때 징계하시는 회초리와 세상 끝에 주는 심판은 손 끝의 매서움이 전혀 다르다. 이 땅에서 죄를 짖고도 꾸짖음과 징계를 잘만 피해 다니는 자의 말로는 <아들이라 칭함이 빠진 판결문> 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 속에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감지되면 피하지 말고 곤장대에 바짝 엎드려 회개하여 이 땅에서의 긍휼이 넘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유일하게 교제하지만 입은 겉 옷이 짐승의 것과 동일하여서 육신의 정욕과 나아가 동물에게는 없는 이생의 자랑을 겸하여서 영이 육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순간 내려치는 매를 피하지 말고 받아 회개에 이르고 영과 육을 성결케 하여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받으려면 <긍휼이 넘칠 때의 심판> 을 감사히 받으라는 말이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 하였는데, 이 말씀이 심판을 이 땅에서 당겨서 다 받으라는 말로 이해한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오묘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질감을 손 끝으로 만져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