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대문고리를 배설물을 내어 주고 잡다
누구든지 <영원> 이라는 개념만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아주 간단하고 쉬워진다. 그래서 나는 <영원> 을 말과 글로 표현해 보려고 애 썼으나 아직 이렇다 할 문장을 찾지 못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 아래서 창조된 우리가 이 제한 밖의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떤 분이 영원을 설명하기를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입에 물건을 물고서 달나라에 날아가 갖다 놓는다. 그리고 돌아와 계속 물어 날라서 이 지구의 모든 것을 다 옮길 때까지의 시간을 <영원> 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언젠가는 끝이 날 일이므로 영원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처럼 그 설명이 이 세상의 표현법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주시려고 그 영원한 로고스이신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항상 준비하신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성경을 펴기만 하면 제일 첫 장에서부터 로고스께서 선포하시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요한이 부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이런 대 전제 하에 시작하는 <그 영원 이전의 태초> 를 요한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하라고 그냥 써 버린 것일까. <영원과 영생> 은 추리나 설명을 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다만 믿음으로 소망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1:2-3)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최고의 지혜와 온갖 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이 만년에 토로한 심경의 글이다. 그리한 뒤 그는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전3:11) 고 고백한다. 세상살이에서 겪고 느낄 수 있는 부침의 세월을 경험한 자가, 마침내 한 문장으로 백년 생애의 목표를 표현한 것이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진정 사모하지만 어떤 영원한 미래를 확보할 수 있는지,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영원한 곳은 영생하는 곳이 있지만 지옥이라 불리는 영멸로 가는 더 넓은 길이 있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그래서 모두가 나름대로의 영생을 추구하여 각자가 믿는 신을 대상으로 하여 죽음 다음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큰 함정이 있으니 육신의 눈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헛되고 헛된 배설물들을 버린 후에야 비로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뚜렷이 보여 붙잡을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난해한 과정이 가로 놓여 있다.
짐 엘리엇이 말한다.“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여기에 한 마디만 더하여 붙인다면, 그는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큰 거래를 성사시킨 현명한 Dealer 이다. 겨우 100년의 삶 동안에 진리의 길을 선택하기만 하면 그 설명 불가능한 <영원한 생명> 을 약속 받는데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의 결정으로 무한대의 보상을 받는 횡재의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태초부터 계시다가 육신을 입으사 내려오신 영원한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아가면 이해 불가능한 영생의 대문 고리를 잡아 챌 수 있는 것이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10년 후의 자화상을 그려 보라고 해도 입을 떼지 못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그러므로 영원은 이해하려 들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소원하고 갈구하여서 작은 헛된 쓰레기들을 내어 주고 얻어지는 횡재의 대문,영생의 대문의 고리를 꽉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