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고자 하시는 전쟁 선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당시 입장은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 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이었다.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대가 되어서는 수시로 신라를 탐하고 영토를 침범해 왔기 때문에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나라의 존폐 위기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였고 지금의 금강 하구인 <백촌강 전투> 등에서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각 나라들은 늘 존폐를 가름하는 전쟁을 해 왔었고 이에 승리하여 남은 나라들이 지금의 열방 들이다. 다른 표현을 하면 숫제 뿌리까지 없어진 부족이나 나라들은 수 없이 많았다는 뜻이 된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상벌의 원칙으로,그의 백성들과 엄격한 상호 계약을 체결하고 선지자를 통하여 수시로 반복해서 확인해 오셨다. 그러나 꾸중도 채찍도 효과가 없을 땐 전쟁을 선포하시듯 하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의 전쟁 선포는 상대를 내몰거나 죽이자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선포는 <살리자는 것> 이다. 주님의 조용한 다독거림에 백성들이 반응이 없거나 나아가 적극적인 배반 행위를 할 땐, 할 수 없이 전쟁 선포처럼 불 호령하신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 좌절하지 말고 그의 진의를 숙고해 보면, 인류를 구원하고자 애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하나님을 배반하여 곧 망하게 될 유다 백성을 향하여 애타게 호소하듯 하시는 목소리를 가슴으로 들어 보라.
예수님이 지상에 오심은 구약 전체에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메세지를 증명하며 구원의 선포를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인간 편의 자세를 살펴 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왜 인간은 부드러운 대화로는 설복되지 않다가 하나님이 전투 방식을 취하고서야 겨우 승복할까. 왜 인간은 치료를 거부하다가 거의 죽게 되어 수술대에 눕혀 놓아야만 구원을 애걸하는 것일까. 왜 인간은 애굽의 바로 같이 강퍅한 마음이 되어 반복되는 강력한 징계를 받아야만 회개하는 것일까. 왜 인간은 회개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속이듯 얼마 지나지 않으면 꼭 같은 고범죄에서 헤매고 있을까 하는 부끄러운 의문이 줄을 잇는다. 이런 조령모개 (朝令暮改)하는 거짓말쟁이 인간들을 살리고자 친히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죽음의 값으로 인간들을 사다니 이런 황당하고도 불평등한 상호 조약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런 대상, 바로 이런 속내를 가지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계속해서 주님을 배반하고, 기회만 있으면 달콤하고 인간의 손 안에 들만한 다른 신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런 변절자들을 예수님은 구원코자 오늘도 그물을 깁고 낚싯대를 점검하시며 애타게 부르신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 (욜 2:13) 혹시 지금도 하나님의 부릅뜨신 눈이 보이는가. 호통 치시는 전쟁 선포 같은 목소리를 들으시는가. 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깊은 죄악의 계곡에서 곡예 하듯 뛰어 다니면서 눈 앞에 있는 초코렛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터질 듯이 애타게 부르시는 구원의 호소임을 깨닫고, 속히 그 죽음의 계곡에서 뛰쳐나오시라. 그리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찾을 것이요 그리고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