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으로 가르는 중앙에 선 십자가 ”
<예수님의 서명 (The Signature of Jesus) 그것은 곧 십자가> 라고 브레넌 매닝 이 말했다.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며 십자가의 보혈이 없 다면 기독교의 존재 의미조차 없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십자가 형을 받는 장면에
서 왜 두 강도의 출현을 하나님은 허락하셨을까. 구원의 핵심 장면을 묘사하시는 가운데 두 조연을 출연시키신 확실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상에서 예 수님은 인류 모든 자들에게 보이신 메세지는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 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24:38-41) 바로 이 설교를 하신 것이다. 여러 기독교 출판사 등에서 그리거나 만든 조형물 십자가는 세련된 액세서리 같 아서 예수님이 지고 못 박히셨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가 멋있고 예뻐서 가지고 싶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다. 실로 십자가형은 현 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권 유린의 혐오스러운 사형 방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모형으로서 십자가의 뜻을 계속 오도시킬 것인 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로마의 전설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찌른 병사 는 애꾸였는데, 예수님의 피와 물이 나와서 그 사람의 눈에 들어갔다. 그는 예수 님을 찔러 그와는 원수가 되었으니 이제 나머지 눈 까지 멀게 되었구나 하면서 한탄하면서 조금씩 눈을 떠 보았더니 안 보이던 눈이 환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 가! 그는 창을 던지면서 “나는 그를 찔러 저주했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피와 물은 나를 축복하여 감겼던 눈이 뜨였구나. 이 분은 참으로 구주시라 나는 그를 믿노 라 ! 하였다는 전설이다. 또 <성의> 라는 내용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서 가진 장교가 그 성의로 말미암아 결국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십자가를 가까이 하여서 극적으로 주님의 편으로 세워진 자들의 이야기는 이 외에도 무수 히 많다. 프랑수아 바리용은 "영적인 진정성을 지닌 단 하나의 기준은 십자가이다. 십자가 로 인도하는 모든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며, 십자가를 제거하는 것 또는 십자가를 교묘히 피하게 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거나 유사품에 속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의 중앙에 서야 함 을 말한다. 그리고 좌와 우편으로 가르셔서 데리고 갈 사람과 버려둠을 당할 자 를 엄중히 구별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강도는 한 패거리였으나 중앙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분리가 이루어졌다. 한 명 <게스다> 는 예수님을 조롱했으나 다른 한 명 <데스마>는 그 동료를 꾸짖고 “ --- 이 사람에게 는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였다. 그들의 그리스 도관과 미래관의 다름이 멸망과 구원으로 영원히 분리된 것이다. 그는 모든 인류 를 구분하기 위해 오셨고, 그는 강도 같은 우리가 바른 그리스도 관과 미래 관을 가질 땐 영원한 구원 쪽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보라 주님께서 철저한 편 가 르기 하시러 오셨음을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 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심판의 주로 돌아오시는 예수님은 그 때도 중앙에 서셔서 날카로운 검으로 구원과 멸망의 선을 긋게 될 것을 후리는 늘 기억하여야 한다.